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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cer

근대 축구 전략의 변천사로 본 미래의 축구 전략 탐구_6

by 솬씨티 2020. 8. 12.

(5) 1960s ~ 1970s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

 브라질 대표팀과 벤피카의 영향을 받아 4-2-4는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일찍부터 수비적인 전술로 ‘이기는 축구’를 표방해 온 이탈리아는 공격적인 4-2-4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 파해법을 연구해나갔다. 이 노력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건너와 인테르의 지휘봉을 잡은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에 의해 집대성됐다.
헝가리 축구의 기본 골격을 이어받은 브라질 4-2-4의 기본 바탕은 ‘포지션 체인지에 기초를 둔 자유로운 공격’이었다. 이에 헝가리와 브라질 지도자들은 “지역방어로써 포지션 체인지에 대처한다”는 수비적 해답을 찾아냈지만, 에레라 감독과 이탈리아 지도자들의 접근 방법은 180도 달랐다. 이들이 찾아낸 해답은 ‘대인방어와 지역방어의 혼합’이었다.
예를 들어 WM 시스템의 고전적인 1:1 대인방어로는 역대 최고의 수비수들을 모아놓지 않는 한 브라질의 4-2-4를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펠레, 가린샤, 바바와 같이 뛰어난 개인기를 갖춘 공격수들을 1:1로 제어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 팀 입장에서는 2:1 수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4-2-4의 공격을 틀어막아야 했는데, 에레라 감독은 이를 위해 ‘리베로(Libero)’라는 역할의 최후방 수비수를 포백 라인 뒤에 따로 포진시켰다. 리베로는 이탈리아어로 ‘능동적인 행위자’, 즉 자유인이라는 뜻이다.

카테나치오


 즉, 에레라 감독은 4-2-4의 공격수 4명을 수비수 4명에게 대인마크시키는 한편, 최후방에 리베로를 추가로 배치함으로써 2:1 수적 우위를 만들어 내거나 유사 시 커버 플레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아군 수비수가 상대에게 돌파를 허용하거나 움직임을 놓칠 경우에도 리베로가 빠르게 2차 수비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이 시스템에서 10명의 필드 플레이어는 자기진영에서 위치하며 볼 획득시 역습을 통해 공격을 하는 방법이었다 (Ralf Peter, 2007).


 이러한 리베로의 존재로 인해 에레라 감독의 인테르는 1-4-3-2(5-3-2) 혹은 1-4-4-1(5-4-1)과 같은 형태를 나타냈다. 또, 이탈리아 언론들은 이 전술에 “빗장으로 골문 앞을 걸어 잠근다”는 뜻의 ‘카테나치오(Catenaccio)’ 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테나치오는 기대 이상으로 효과적이었고, 인테르에게 63/64, 64/65 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2연패라는 영광을 가져다줬다. 이탈리아 대표팀 역시 1966년 월드컵에서는 북한에 발목을 잡혀 고배를 들이켰지만, 유로 1968 우승을 통해 카테나치오의 위력을 전 유럽에 알렸다.  이 전술의 확립과 유행은 이탈리아 축구계를 온통 ‘골’이 없는 경기로 만들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수비와 교묘히 치고 빠지는 절제된 공격, 이 틈에 오고가는 양팀간의 치열한 신경전과 심리전, 이를 통해 나타나는 거친 몸싸움과 투쟁 등의 ‘승부’라는 본질적 의미에서 오는 ‘낭만’과 ‘즐거움’이 지루함을 초월해 이탈리아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전략 역사)

 한편 이탈리아 이외의 유럽 국가들은 브라질과 벤피카의 4-2-4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보다 거칠고 스피드 위주의 스타일을 갖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경우 두 명의 미드필더만으로 공수 밸런스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해 1960년대 중반 들어서는 4-2-4에서 미드필더 한 명을 늘린 4-3-3 형태가 유럽 팀들의 보편적인 밑그림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월드컵의 잉글랜드, 서독, 소련 등이 가장 대표적인 팀들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1960년대 후반 들어 세계 축구의 패러다임이 4-3-3 쪽으로 흘러가자 카테나치오의 밑그림을 1-4-3-2(혹은 1-4-4-1)에서 1-3-3-3으로 변형시켰다. 이탈리아 역시 4-3-3을 기본 포메이션으로 활용하긴 했지만,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는 카테나치오 전술로 인해 실제로는 1-3-3-3과 같은 형태를 나타냈던 셈이다.
1970년 월드컵 결승전은 공격축구를 대표하는 브라질의 4-2-4(혹은 변형 4-3-3)와 수비축구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가 맞붙은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경기 결과는 브라질의 4-1 완승이었고, 카테나치오는 이 패배 후 급속도로 쇠락하며 유럽 축구의 주류로부터 벗어나고 말았다. 반면 네덜란드는 헝가리와 브라질의 공격적인 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 ‘토털풋볼’이란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며 1970년대를 지배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이론가들은 네덜란드의 토털풋볼이 태동한 시기를 현대축구의 출발점으로, 그 이전을 고전축구로 구분한다. 실제로 토털풋볼에 의해 강조되기 시작한 압박, 빠른 공수전환, 템포 조절, 포지션 체인지와 같은 개념들은 현대축구의 태동 및 완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만큼 토털풋볼의 등장은 혁명적이었고, 또 축구 발전 양상에 일대 전환기를 불러왔다. 이처럼 현대축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토털풋볼이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제10회 1974년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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