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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Review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서평

by 솬씨티 2020. 5. 31.

중요한 것은 동기다 ∥ 이마누엘 칸트

 많은 철학자들이 도덕적 근거에 대해 고민한다. 적어도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라면 무작정 다른 사람들의 인권을 배제하고 공동선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칸트도 이런 점에선 같은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는 더 구체적으로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도덕의 최고 원칙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그 원칙을 알기 위해 그가 말하는 논리란 다음과 같다. 일단 앞에서 말했다시피,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도덕이란 사람들의 기호나 욕구 등으로 좌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사람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자율적으로 선택하기에 존중받아야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칸트의 주요 논지가 나온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최고 원칙은 간단히 말해서 어떠한 조건도 없이 행동하는 이성이다. 

 이 점에서 난 의문이 들었다. 정말 과연 사람이 어떠한 조건 없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주변에 어떠한 조건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만 해도 그렇다. 대권을 잡기 위해 쉽게 상대 당을 매도하는 건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우롱하는 일은 십상이다. 또한 우리나라 대기업에서도 끝없는 자산 축적을 위해 비자금 비리는 정말 신문에 안 실린 적이 없을 정도다. 지금 내가 부정행위를 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을 비판만 하기 위해 예를 든 것이 아니다. 이런 예를 보다시피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부정행위까지 일삼는 자들에게 칸트의 ‘순수 실천 이성’이 발휘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가 주장하는 것의 전체적인 맥락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사람은 감각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이 자연법칙(타율)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지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법에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오직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 즉 부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구에 의해 행동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칸트는 이러한 욕구는 자신의 내면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외부 영향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도덕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선 ‘감각 세계의 여러 원인이 초래한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이성이 담당하는 기능)인 자유로운 상태’를 지녀야 한다고 전제한다. 


 결국 그가 주장한 철학관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이상적이다. 사람이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오히려 그런 욕망, 즉 꿈이 있고 희망을 품고 사는 삶이 그렇지 않는 삶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할 수도 있다. 지금 전 세계의 유명 인사들은 다 자신의 분야에 최고가 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욕심을 갖고 자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닌가? 


 현실과는 약간 유리된 감이 있는 칸트의 철학관을 이런 관점에서 봤으면 좋겠다. 일단 현재에 충실하자. 현재에 충실하되 궁극적인 가치관,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인생관을 순수 실천 이성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누구나 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도구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이성적 능력에 대해 존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악의가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사회는 정의에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 충직 딜레마

 평소 깊게 생각해봤던 주제였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제목만 봐선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구성원들이 어떤 계약을 맺고 그 계약을 이행하기위해 의무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테마에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형식적인 서명을 하는 등의 계약은 없다. 하지만 ‘서사적 이야기’ 속에 속한다면 우리는 전부 ‘계약’에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도덕적 개인주의에 따라 당신들의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사죄를 반대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과 혹은 미국에서의 노예제에 대한 배상 문제가 그 예들에 해당한다.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겐 집단적 책임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엔 도덕적 의무를 갖지 않는 다는 논리이다. 


 어쩌면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칸트의 도덕법을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위치를 미리 정하고, 우리에게 역할을 분담하여 우리를 도구로 간주해 의무를 지게 한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에 애초에 서로에게 지는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인간(人間)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하는 존재이다. 그 사이에 살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신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간단한 대화를 한다거나, 무엇을 필요로 해서 산다거나, 사랑을 한다는 등의 인간사 모든 것은 다 상대가 있어야한다. 이처럼 자기 혼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어느 인간이든지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결국 우리는 ‘서사적 이야기’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내가 왜 존재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묻기 전에 ‘나는 어떤 서사적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역사적 역할에 정확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사회적 역할로서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조금 더 연대감을 느껴야 한다. 소득세에 대해 사회적 분배의 정도를 높이는 등의 제도적 차원에서의 연대감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중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도 그 역할 중 하나다. 대중교통에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기, 장애인들에게 봉사하기, 동성애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주기 등 모두가 자기의 사회적 역할로서 서사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역사적 역할에도 충실해야한다. 일본이 과거 일제 시대 때 저지른 위안부 사건이나 미국이 노예제로 흑인들을 착취하는 사건 등에 대해서도 국제적으로 사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예처럼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과거에 잘못한 실수가 있다면 당당하게 밝히고 그것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한다. 정치인이 생각이 짧아 뇌물을 받았거나, 어떤 고소득자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탈세하는 등의 과오가 있다면 떳떳이 밝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사죄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연예인 엠씨몽이 군역을 기피하기 위해 정상적인 생니를 뽑은 것이 탄로나 사실상 가택 연금 조치를 당하고 있다. 그는 떳떳하게 사회로 나와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인정하고, 좋아하는 연예 활동을 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의 정의를 위한 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서사적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고 그 의무를 회피하는 것은 오직 짐승이나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 맞는 사회적․역사적 역할에 충실히 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이자, 이 사회의 올바른 정의에 다가가기 위한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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