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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Review

영화 플레전트 빌(미국,1998) 평론

by 솬씨티 2020. 5. 29.

조화로운 이상향을 향해

 


 <플레전트 빌>의 흑백 세계에 빠져버린 데이비드와 제니퍼는 그 세계를 컬러 세계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흑백 세계에서의 기계처럼 반복되는 여러 가지 질서들 그리고 모험이나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운명에 맞서 싸운다. 결국 플레전트 빌도 컬러 세계로 바뀌었으며 데이비드는 현실로 돌아간다. 영화가 컬러 세계로 바뀐 채 끝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영화감독은 흑백보단 컬러 세계를 더 지향했을 것이다. 논지를 전개하기에 앞서 이상향의 개념을 전제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이란 최대한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존 롤스가 선호하는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적인 사회다. 그렇다면 컬러 세계가 이상향의 사전적 의미인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이야기 구성상 지양되었던 흑백 세계의 모든 요소를 거부해야만 하는 걸까?

 컬러 세계에도 유토피아라고 불릴 수 없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 영화에서 컬러란 욕망을 상징한다. 각자의 욕망이나 욕구를 채워나가기 위해 서로에게 계속되는 갈등과 반목이 이어진다. 영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볼 수 있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우에게 고백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그냥 그림의 떡일 뿐, 그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한다. 데이비드의 어머니는 통화로 데이비드 아빠와 싸우는데,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TV 속의 평화로운 흑백 플레전트 빌에서 나오는 부모님 간의 화목한 대화 속에 나오는 대사를 따라 한다. 마치 그런 평화로운 가족 분위기가 부러운 것처럼. 데이비드의 쌍둥이 여동생 제니퍼도 이런 갈등의 올가미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불량 학생이었으며, 그에 비해 어중이떠중이 같은 데이비드를 창피해한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학생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리고 TV 리모컨을 가지고 데이비드와 몸싸움도 서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컬러 세계가 더 디스토피아처럼 보인다. 영화 속 모든 주인공의 컬러 세계에서의 생활이 한 치의 여유나 양보가 없는 삭막한 삶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정말 우리들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똑같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회 의사당 내에서도 싸움을 벌이는 국회의원들, 수백억의 비자금으로 자기 사리사욕만 챙기려는 대기업 고위 인사들 등은 영화 속 데이비드와 제니퍼처럼 소위 자신의 ‘컬러’를 과도하게 고집하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 구성상 지양했던 흑백 세계의 모습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컬러 세계보다 더 낫다. 영화에서 흑백의 의미는 한마디로 말해 무미건조다. 어떤 모험이나 용기 같은 요소들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흑백은 절제, 금욕, 목표 없는 삶(No-Goal) 등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세계 사람들 삶은 완전히 규칙적이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우선 왔다고 인사를 하고 모자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신발을 벗는 순서가 언제나 지켜진다. 그리고 식당에서 영업시간을 정확히 지켜 오직 음식 만드는 일에만 매진한다. 조금 극단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이 세계에선 위험 요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화재 사건이 없기에 이 세계 사람들은 안전하다. 비도 오지 않아 우리나라 같이 여름 때마다 홍수로 피해 볼 일도 없다. 

 이제까지 언급한 흑백 세계의 특징 두 가지, 완벽한 규칙성과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특성 덕분에 흑백의 플레전트 빌은 안전하다. 이렇게 흑백 세계의 안전을 보장하는 특징들은 시민들을 지켜주는 법 제도와 경찰서, 소방서 같은 사회 시설 등이랑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현실에서도 법치국가이고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치안이 발달한 국가들이 대게 OECD 평균 행복지수가 높다. 반면에 부정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으면서 콩고를 무력으로 통치한 모부투 세세 세코로 인해 비리가 팽배해져 콩고 민주공화국은 극빈국이 되었으며, 수많은 주민들은 미비한 치안 상태 때문에 매일 불안에 떨고 있다. 이런 점을 비추어 볼 때 일정한 규칙, 일사불란한 질서와 부정부패를 막는 법 같은 흑백 플레전트 빌을 대표하는 요소들이 진정한 이상향의 충분조건인 것 같다.

 여기에서 흑백 플레전트 빌에 대한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법이나 규칙 등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믿음을 성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정한다. 그들은 그 세계에 속박된 나머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사고할 수 없는 이성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와 같은 제도이다. 다시 말해 흑백 세계에서 이상향의 충분조건은 그 사회 시민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 줄 수 있는 규칙들이라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영화 속 컬러와 흑백 세계가 상징하는 바에 대해 정리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컬러는 개개인의 욕망을 뜻한다. 그 욕망은 용기를 앞세운 모험이나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경우, 서로 자기 이익만을 고집하는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탕 속의 개싸움 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흑백은 규칙과 질서에 따른 절제와 금욕을 뜻한다. 이 또한 지나치게 흑백 세계적 경향을 띠게 된다면 실패하는 사람도, 반항하는 사람도 없으며 먹을 것도 넉넉한 풍요로운 세계이지만, 그마저 지루하게 느껴지는 무미건조한 사회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흑백 세계적 경향 정도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도가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세계를 지향해야 할까? 답은 없다. 앞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우리는 한 세계만을 고집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양자택일이 아닌 세상 모든 것들의 조화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컬러 세계의 적당한 욕망과 욕구를 지니면서, 흑백 세계의 질서와 규칙이 공존하는 그런 조화로움이 있는 세계 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어떤 것이라도 정도가 지나치면 안 된다. 영화에서 나온 두 세계의 모습은 정도가 지나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컬러 세계가 능동적인 삶의 터전이라 좋은 게 아니고, 흑백 세계 또한 수동적인 삶의 터전이라 나쁜 게 아니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이기에 언제나 규칙적인 중력이 있는 자연 영역과 의지의 자율의 실체인 이성 영역이라는 두 땅에 동시에 발 딛고 서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게 봐서 욕망과 질서 이 두 영역의 조화로움을 위해 사고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이상향으로 삼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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